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답하라 1988/배경해설 및 고증오류 (문단 편집) === 9화 === * 인신매매 얘기가 나올 때 TV 속에서 지나가는 화면으로 나오는 복도 씬은 당시 널리 방영되었던 공익광고로, 어떤 아가씨의 뒤를 뒤따라오던 수상한 남자가 알고 보니까 옆집에 사는 아이 아빠[* 옆집 문이 열리고 "아빠!" 하면서 아이와 아내가 마중 나온다.]였다는,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자' 는 내용이다. 해당 [[https://www.youtube.com/watch?v=8R50Tjk8x_U |공익광고]] 성덕선과 김정환이 골목길에서 겪은 상황이 해당 광고의 패러디다. 참고로, 당시 [[인신매매]]가 상당히 기승을 부렸는데, 1980년대 경찰력을 죄다 공안사범--이라 쓰고 시위 진압이라 읽는다--에 할당하다 보니 민생치안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정권을 지키기 위해 민생을 나 몰라라 한 것이다. 이 때문에 '80년대 10대 범죄'니 '[[화성 연쇄 살인 사건]]' 같은 굵직한 범죄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노태우 정부]]가 칼을 빼든 것이 바로 [[10.13 특별선언|범죄와의 전쟁]]이다. --범죄자가 범죄와의 전쟁을 벌였다-- * 김정환이 빌려온 [[프레데터]] 비디오테이프는 실제로는 당시 [[20세기 폭스]]사의 영화를 독점출시했던 대우전자(세신영상, 이후 우일영상)에서 출시되었다. 드라마에서 출시사로 표기된 영성프로덕션은 영화제작 및 홍콩영화 전문 수입사였던 동아수출공사가 1990년에 만든 자회사이기 때문에 시기상으로나 고증상으로도 맞지 않는다. 게다가 제목의 폰트는 1990년에 만들어진 2편의 개봉 및 비디오 출시 당시의 것이다.[* 당시기 전후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의 국내 비디오 출시사 체계는 다음과 같았다. [[워너브라더스]] - SKC, [[파라마운트]] / [[유니버셜]], - UIP/CIC, [[20세기 폭스]] / [[콜럼비아]] - 대우전자(세신영상), [[디즈니]]([[터치스톤]], 할리우드 등) - 드림박스] *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 방송에서 [[이문세]]가 [[이경규]]를 신인 개그맨으로 소개하는데, 사실 이경규는 1981년에 데뷔했다. 단지, 무명기간이 길었을 뿐... [[일밤|일요일밤의 대행진]] 과거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마당놀이에서 조정현과 김정렬의 조연을 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015년 현재로 치면 무한도전에서 부르면 언제든 달려와주는 홍진경이나 김영철 같은 포지션. 개그맨으로서 그 당시 나쁘지 않은 수준 정도였으나, 특히 청소년들한테 이경규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것은 매주 일요일 방송되었던 '별밤 공개방송'에서 이성미 후임으로 고정 게스트로 출연했던 때이다.(이후 몰래카메라의 대 성공으로 '무적' 행진을 이어가게 된다.) 그때 이경규의 캐릭터 성격은 '돈 밝히는 이경규'. 별밤 공개방송에서 이경규에게 수고했다고 상으로 '태광 에로이카' 오디오와 '[[짜짜로니]](당시 이경규가 광고)' 몇 개를 줬는데, 이경규 왈 "상은 이문세 씨에게 드리고 싶습니다.......(관중 오~~~~) 저한테는 태광 에로이카가 있으니까!!!! 뭡니까 라면이나 주구!!!" * 별밤지기 [[이문세]]가 [[이수만]]을 '마삼트리오'의 일원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실제 이런 그룹이 있었던 게 아니라 당시 가요계에서 얼굴 길기로 유명했던(.,..) 이문세, 유열, 이수만을 묶어서 부르던 말이다. 특히 이문세의 말 기믹은 꽤 유명해서 1988년 당시 월간 만화잡지 '보물섬'에 연재되던 '풋나기의 빵점일기'에서는 아예 '''마문세'''라고 패러디되어 나왔을 정도. 또한 마삼트리오라는 이름으로 [[현대 엑센트]] 광고까지 찍었고 수익은 전액 기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마삼트리오 세 양반은 지금도 정기적으로 모인다고 한다. 그것도 무려 가족모임~~ ||<:>[[파일:jiPbCvih.jpg|width=100%]] || * 별밤을 듣고 있는 성선우의 AM라디오는 700-800KHz 사이에 맞혀져 있는데,[* 이 사이에는 [[KBS 제1라디오]]와 [[KBS 라디오서울]](현 [[SBS 러브FM]]) 주파수이다.] 서울 기준으로 [[MBC 표준FM|MBC 라디오]]의 AM주파수는 900kHz이다.[* 당시 MBC의 중파송신소는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있었다.] 참고로 이 당시에는 [[표준FM]] 개국이 이루어진 지 1년가량이 경과하였으므로 굳이 AM으로 들어야 할까 싶기도 하다. ~~성선우의 주머니를 생각해~~ 더욱이 AM은 주변 전기 잡음에 민감하여 형광등 같이 전기제품 가까이에서 들으면 잡음으로 정상적인 수신이 어려울 수 있다. * 정환이네 집에서 모여 갈비찜 먹는 장면에서 성덕선이 "잘났어 정말"이라는 유행어를 하는데, 이는 드라마 ‘사랑의 굴레’에서 [[고두심]]이 했던 대사이며, 방영기간이 1989년 4월부터 10월이므로 미래의 유행어이다. * 김선영이 조흥은행 직원과 통화하는 장면에서, 전화가 끊긴 후 들려오는 통화 끊김음이 한국에서 쓰는 것이 아니다(...). 굳이 찾자면 지금은 사라진 기계식전화 가입자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통화중인 경우 나오는 음으로 쓰인 것과 비슷하다. * 김선영이 법원송달 우편물을 받는 장면에서 집배원이 수령인 서명을 받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에는 수령인의 도장, 없을 경우 오른쪽 엄지 손가락 지장을 받았다. * 김선영이 성선우의 대학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개설한 통장은 입출금식인 자유저축예금인데, 겉표지는 정기적금(...)이다. 일단 계좌번호가 한일은행 계좌번호가 아니라 서울신탁은행 1989년 이전 계좌번호 체계다(...). * 성덕선과 성노을이 보고있는 [[가요톱10]]에서 [[박남정]]의 ‘널 그리며’가 나오는데, 이는 1989년 6월에 방송된 상반기 결산 방송분이다. 특히 MC [[임성훈(방송인)|임성훈]]이 '89 상반기 결산'이라고 발음하는 것으로 봐서 대놓고 고증오류 인증이다. * 박남정은 [[1989년]] '널 그리며'를 통해 더 큰 인기를 얻었고, 1989년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서 골든컵을 수상했는데, '널 그리며'와 '사랑의 불시착' 두 곡으로 1989년에만 골든컵을 2회 수상한 몇 안 되는 사례였다. * '널 그리며'에서 나오는 춤은 지금도 박남정의 트레이드마크로 유명한 ‘ㄱㄴ춤’이 당시에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였다. 성노을이 성덕선에게 "춤을 못 춘다"고 타박하면서 직접 보여주는 그 춤이다. 사실, 이 춤은 [[자넷 잭슨]]의 'Pleasure Principle' 안무를 베낀 것(...)이다. 박남정만 베낀 것은 아니었고 일본의 [[쿠도 시즈카]][* [[키무라 타쿠야]]의 부인으로 유명하다.]와 1990년대 초반의 일본의 여성 아이돌 그룹 CoCo도 베꼈다. * 최택이 경기를 한 [[광저우]]는 아열대 해양성 계절풍 기후로 1월 평균 최저기온이 10도, 평균 최고기온이 18도 정도인 따뜻한 곳이다. 1월이라고는 해도 우리나라 봄 가을 정도의 날씨이기 때문에 별다른 난방을 하지 않아도 춥지는 않다. [[중국]]의 고질적인 텃세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넣은 설정이지만, 성덕선이 표현대로 추워서 꼴까닥 할 정도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사실 성덕선이 최택을 위해 오버한 것일 수도 있다.~~ * 성덕선이 최택을 따라 중국으로 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남자애들은 [[여권]] 발급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여자애들은 기원에서 힘을 쓰면 2~3일 이내면 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건 병역 문제 때문으로, 군 미필 남성들은 귀국[[보증]]인을 2명 세워야 되는 등 여권발급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절차도 복잡했다.~~이걸 복잡한걸 스티브 유가 잘 써먹었다.~~ 2005년에서야 이게 간소화되었다. * 별도로 [[중국]] [[비자]] 문제는 언급이 안 되는데, 지금이야 수수료만 내면 1박 2일만에 발급이 되지만, 이때는 아직 중국이 [[한국]]과 [[미수교국|수교하지 않았을 때]]다. 중국이 한국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1992년이다. 그러나 이미 1983년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때부터 긍정적인 관계가 오고갔고,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도 중국이 공산권에서는 가장 먼저 참가 의사를 밝힐 만큼 관계가 개선되었던 때이니 비자 발급에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중국도 바둑을 국가 차원에서 밀고 있었으니 자국 바둑기사와 대국할 타국 바둑기사의 수행원이 1명쯤 추가되는 것을 굳이 막을 이유도 없었다. 막았다가 구설수에 오르면 자국 기원 이미지에만 금이 가니까. * 1989년 당시 신축 아파트가 아닌 많은 수의 단독주택(구옥)의 경우 220V 전압이 아닌 110V 전압을 사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덕선이 전기장판/전기요 등을 중국으로 가져가서 중국의 220V 콘센트에 꼽았다면?? 물론, 정환이네 집이 220V 승압공사를 완료했다면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실제로 13화에서 정환이네 집에 220V용 다리미가 등장했다.] * 사실 1970년대 후반부터 국산 가전제품은 110V/220V 겸용으로 나오기 시작하여 1989년이라면 대부분의 가전제품은 110V/220V 겸용으로 제품 구석 어딘가에 절환 스위치가 있어서 그걸 조작하면 별 문제없이 220V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정부에서 1989년부터 단계적으로 110V 전용제품은 생산을 금지할 정도로 겸용제품이 이미 많이 보급된 상태였다. * 물론, 덜렁대는 성격의 성덕선이 그런 스위치까지 알고 조치를 취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십중팔구 꽂지도 못했을 것이다. 플러그 규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단자/전원]]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한국은 110V는 Type A, 220V는 Type C나 F를 썼다. 그러나 중국은 이것과 전혀 호환되지 않는 Type I를 쓰기 때문에 어댑터가 없으면 꽂지도 못한다. (사실 묘사된 성덕선의 성격상 프론트에 어댑터와 변압기 내놓으라고 했을 확률이 높다.) * 최무성이 과거 회상 씬에 나오는 [[1977년]]의 [[경상남도|경남]] [[김해시|김해]]는 ‘시’가 아닌 ‘군’이었으며, ‘시’가 된 것은 1981년이다. 다만, [[봉황동(김해)|봉황동]]은 맞는데, 1980년대까지는 읍, 면 밑에 동을 두는 경우가 많이 있었고[* [[서천군]] 장항읍에는 규모가 좀 있는 도시에서나 볼 법한 '''창선동1가'''라는 행정구역이 있었다.(…) 지금은 창선1리로 개칭.], 김해읍도 그 중 한 곳이었다. 김해읍이나 [[조치원읍]] 등 당시 규모가 좀 있던 읍은 [[1941년]] 하위 ‘리’를 일본식 이름인 ‘정’으로 개칭했으며, 해방 후인 [[1947년]]에 동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88년]] 당시까지 읍, 면으로 남아 있던 곳은 산하의 동을 ‘리’로 다 바꾸었다. * [[중국]]에 따라가게 된 성덕선이 처음 [[여권]]을 받는 장면에서, 여권 발급일이 ‘DEC. 01. 1989’로 찍혀 있다. 현재 여권의 날짜 표기는 일-월-년 순서지만, 당시 날짜 표기 순서는 월-일-년 순서였다. 이 순서는 고증에 부합하지만 분명 1월이어야 할 성덕선의 여권 발급일이 1989년 12월 1일이다. 드라마 상의 시기가 1989년 1월이니 아직 오지도 않은 날 발급된 여권을 받은 것이다. JAN. 01. 1989라고 해야 맞겠지만... 1월 1일은 공휴일이라 여권발급이 될 리가 없다. 고증의 오류는 아니지만 옥에 티로 봐야 할 듯. * 성덕선의 여권 속 증명사진이 머리가 귀를 덮고 있고, 흰옷을 입고 있으며 배경도 흰색이 아니라서 외교부의 여권규격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여권사진에서의 ‘흰옷 착용 불가, 흰 배경 규정’은 무려 16년 후인 2005년 9월 30일부터 적용된 규정으로, 그 이전에는 ‘모자나 색안경 착용불가, 사진 크기’ 정도에만 규제가 있었고 옷 색깔이나 배경색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 [[중국]] 호텔의 프론트 직원으로 등장한 배우의 [[중국어]] 발음이 [[영 좋지 않다]](...). --낯선 외국어 대사를 수십 번 연습했을 신인배우에게 응원을-- * 닭장차에 의해 [[경기도]] [[파주시]]에 내동댕이쳐진 성보라가 20원으로 빨간 공중전화를 이용해 쌍문동으로 전화를 거는 장면이 나오는데, 명백한 고증오류다. 첫째로, 빨간색 공중전화는 시내통화만 가능한 공중전화며, 애초 10원짜리밖에 들어가지 않고, 2번째로, 당시의 시외전화는 거리에 따라 요금이 매겨지는 것이라 20원으로 통화가 안 된다. --돈이 20원만 있었던 건 아니니까...-- 시외통화가 가능한 공중전화는 100원이나 50원 동전을 투입할 수 있는 사각형의 대형이었으며, 회색컬러라 모양이 예쁘지는 않았다. 시외통화 가능한 공중전화 모델은 1화에 등장한 적이 있다(피켓걸 연습하던 성덕선이 집에 전화하는 장면). * 성선우가 통일촌까지 타고 온 마을버스의 차종이 일본 [[토요타 코스터#s-2.2|도요타의 코스타 모델]]이다(...). 이런 수입버스를 마을버스에 쓸 리가(...). 당시 비슷한 크기의 차종으로는 [[기아 콤비|아시아 콤비]]가 주류였다. 도요타 코스타는 [[현대 미니버스]]와 적당히 비슷하게 생기긴 했는데, 현대 미니버스는 1970년대 중후반에 나온 모델이다. 물론 당시에는 [[파주시]]쯤 되는 시골은 아직도 [[GMC]] 트럭과 [[영운기]]가 굴러다니던 동네긴 했지만. 여담으로 이 시기의 승합차는 이미 [[기아 봉고]]와 [[현대 그레이스]]로 양분되어 있던 시기이고, 노선버스는 20년쯤 묵은 프론트엔진형 차량이 로컬노선에서 굴러다니던 때이다. 상부냉방이 달려 있던 현대나 대우, 아시아 버스 같은 고급형들은? 고속도로 직행이나 고속버스에 쓰였다. * 별밤 잼 콘서트의 인기는 '거기 가고 싶으니 가자'라고 갈 수 있는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추첨을 통해서 티켓을 배부했기 때문이다. 티켓 얻는 것은 당연히 '하늘의 별따기'였고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일개 '라디오 방송사'의 행사가 어떻게 방송 소재가 되었는지 생각해보자.) 또 지금의 아이돌 공연을 능가하는 엄청난 인파와 열기로 상당히 번잡하고 뜨거웠을 텐데(새벽부터 기다리기는 예사이고), 촬영시 인력동원 사실상 힘들 테니 어쩔 수 없이 '한적한' 공연 풍경이 되었다. 하지만, 고증오류라기보다 이런 디테일하게 구구절절 들어가다 보면 1회 분량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작가가 추억을 상기시키는 차원에서 '잼콘서트' 소재만을 차용해서 쓴 것으로 보인다. --나이든 팬으로서 작가의 배려에 정말로 감사하다. 절대 비꼬는 것이 아니다. 정말 감사하다.-- * 성덕선이 별밤 콘서트에 '[[이수만]]도 나온대!'라고 호들갑을 떠는 장면이 있는데, 이수만이 가수로 인기를 끌었던 건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이며, 이후로는 유학을 다녀오며 공백이 생겨 1989년 당시에는 인기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1988년에는 주로 MC나 라디오 DJ로 활약하고 있었으므로, 그 당시 여고생이라면 이수만이 원래 가수라는 걸 모를 수도 있을 정도로 가수로서의 인지도는 매우 낮았다. (단 DJ로서 당시 진행했던 '팝스투나잇'의 인기는 만만치 않았다.) --물론, 이것은 'SM 이수만이 가수였대!' 개그를 의도한 것-- * 김정봉이 [[백담사]]에 간 것을 두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대한불교 조계종]]이 체험 프로그램으로 처음 시작한 [[템플스테이]]를 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으나, 이 경우에는 그냥 [[절(불교)|절]]에 들어가서 머무른 것이다. 절은 기본적으로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공양(식사)을 제공하며, 잠을 재워준다. [[불교]] 신자이건 아니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서울]]시내에서 접근하기 쉬운 [[도선사(사찰)|도선사]]나 [[조계사]], [[길상사]] 등을 공양시간에 맞춰 방문하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누구나 식사를 할 수 있다. 물론, 공짜라고 생각하지 말고 쌀이나 소액의 돈을 보시하는 것이 마음도 가볍고 좋다.][* 일부 사찰 등에서 실비로 돈을 받기도 하는데, [[불교]]계 내에서도 말이 많다. 특히나 [[조계종]]은 탁발 금지이기 때문에 신도나 절이 알아서 서로 잘 해야 하는데, 돈 얘기로 얽히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진다.] --그렇다고 공양시간도 아닌데 밥 달라고 떼쓰거나 무조건 밥 먹여주고 재워 달라 떼쓰지는 말자-- * 다만, [[스님]]들의 수행이 우선이기 때문에,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별도의 공간을 두어 찾아오는 이들이 머무르게 하기도 하며, 머무는 사람들도 알아서 자기들이 머무를 동안의 비용 등을 내놓는 것이다. 또한 절의 규모가 작을 경우 손님을 맞이하기 힘들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절은 손님이 현실적으로 머물 수 없기도 하다. 특히 공양보살이 안 계시는 소규모 암자들이 이렇다. * 큰 규모의 절에서는 돈이나 시주할 물질이 없다면 절 살림을 도우며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불자가 아닌 사람들도 예전부터 사찰에서 오랜 기간 머물며 고시공부나 마음정리 등을 했던 것이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그런 연유로 절에 머무는 사람들의 숫자도 꽤 많다. [[템플스테이]]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시작한 것으로 간략화된 [[불교]]체험코스일 뿐이다. ~~[[달마야 놀자]]의 츄리닝맨도 있잖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